기타/남미

[남미여행 / 쿠스코]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

코드아키택트 2021. 2. 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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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20시간 버스

 리마에서 타이완 할아재의 쿠사리를 먹었지만 여행은 계속 되어야 했다. 남미에 대한 튜토리얼을 마치고 나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씩도 아니었지. 리마에서 쿠스코로 달리며 나는 엄청나게 단련되었다. 남미를 돌아다니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시간 비행기를 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스를 타는 것이다. 비행기를 예약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나는 고전적인 버스를 택했다.

 

 버스는 등급에 따라 까마 세미까마 쩌리짱으로 나뉘는 시스템을 가졌다. 나는 그떄 제일 좋은 까마를 탔던것 같다. 리마에서 쿠스코 까진 거의 20시간에 걸쳐 갔던것 같다. 그래서 버스기사도 둘이 탄다음에 밤낮으로 교대해가며 길을 달린다. 스페인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버스 밖을 한번도 나서지 못했다. 혹시 내렸다가 못탈까봐. 그렇게 20시간을 달렸으니 속이 울렁거려서 토했었다. 

 

 

스페인과 잉카가 공존하는 도시

아르마스 광장. 얘네는 맨날 아르마스다.

 쿠스코는 아주 다이나믹하다. 남미에서 꼽을만한 도시라고 한다면 쿠스코는 꼭 꼽고싶다. 이 동네는 특이한 점은 건물의 기단부분은 잉카의 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위는 스페인식으로 지어져있다. 당시 책에선 잉카의 석조술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다루고 있었다. 돌 틈 사이에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쌓았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가? 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했지만, 요즘 돌아보니 현대인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해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흔한 동네 풍경
이 부분이 아마 태양의 날에 퓨마의 형상이 나온다는 그곳.
들판과 성당
내가 묵었던 숙소의 고양이

 

 

고산병과 안도감

 한 박정희 시절쯤 유소년 축구단 이약기가 있다. 그때 당시 축구 경기는 남미에서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미리 현장답사를 갔던 축구 감독은 산소부족으로 숨쉬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유소년 축구단을 마스크 씌우고 시합 준비를 시켰다고 한다. 당연히 국민들은 정신나갔다고 욕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꽤나 높은 등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쿠스코 마추피추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고산병 얘기를 안할 순 없다. 그만큼 대지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몇몇사람들은 마추피추에 갔더니 숨이 더 차더라 라고 하는데 그거 다 플라시보 효과란다. 쿠스코가 훨씬 높다고 한다. 

 

그렇단다.

 고산병이라는게 사람마다 증세의 차이가 있긴 한거 같다. 나같은 경우엔 숨쉬기가 정말 힘들고 숙소에서 광장까지 200여미터도 되지 않았는데 그걸 갔다오기가 정말 힘들었다. 임시 방편으로 코카차를 많이들 마시지만 결국 적응밖에 답이 없었던거 같다. 하루정도 동네에 있다보니 그나마 걸어다니기 훨씬 수월했다. 

 

 여기에서 안도감을 느꼇던 것은 내가 여행을 계속해도 문제가 없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동양인. 드디어 동양인을 만났다. 나를 맨처음 맞이했던건 일본인들 이었다. 숙소로 향하는 나를보고 그들은 매우 반갑게 '니혼진?' 이라고 던졌고 나는 '칸고쿠진'이라고 했다. 그때도 나는 간단한 일본어가 가능했다는게 놀랍다. 그들은 일본인 특유의 '아아..'를 외치며 갈길을 갔다. 그리고 리마의 뭔가 우중충한 느낌과 다르게 쿠스코는 조금더 활발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안들어갔던 그 성당.
야경을 잘 찍을줄 몰랐던 나의 사진.

 

 

나의 사진첩에도 많은 야경사진이 남아있는걸 보니 꽤나 괜찮은 관광지 였다.

 

뭔가 유명한 건물이었는데
산에 켜진 불
알파카 제품 공인 상점
광장 주변

 

역시나 광장 주변
광장 조형물.

 사실 밤이라고 해봐야 그리 멀리가진 못했다. 불이 아주 환하게 켜진 곳들만 다녔지. 광장사진을 보니 또 다른게 생각났다. 이때부터 생긴 내 관념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차와 사람중 누구를 더 우선순위에 놓느냐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소리냐. 내가 차도를 건너려고 할때 차가 기다려주면 선진국 나를 치려고 하면 후진국이라는 소리다. 

 

 실제로 여기는 차있는 놈들이 자기가 먼저가려고 굉장히 들이미는 스타일 이었다. 반대로 칠레에 갔을땐 건너라고 기다려주던 그들의 모습에서 이게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라고 느꼈다. 그건 독일 여행을 갔을때도 그랬고.

 

 

 

잡숴봐 잉카콜라

 코카콜라의 위력은 대단하다. 우리나라 안에 있는 수많은 탄산 상품들과 몇몇 음료들은 코카콜라 마크가 찍혀있다. 남미에는 정확히는 페루에는 잉카 콜라라는 것이 존재한다. 책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고 유난을 떨고 있다. 비쥬얼은 굉장히 신기하다. 잉카콜라라는 컨셉에 맞게 뭔가 남미색이다. 물론 엔진오일 색깔이기도 하지만. 

 

 내가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왔을때 즈음엔 잉카콜라를 수입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요즘 마트에서 볼 수 없는걸 보니 크게 잘되진 않았나보다. 맛은 밀키스맛 정도였던거 같다. 맛이 특별하진 않지만 한번정도 도전해 볼만하다. 

 

 

 

엘퓨마 호스텔

 퓨마는 이들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보다. 내가 여기를 왜 갔냐면 전장에 언급한 베네수엘라 친구를 따라서 갔다. 여기서 난 매우 잘생긴 홍콩 청년, 미국 유학하다가 유학이 끝난겸 온 한국 여자, 일요일에 성당을 가야한다던 호스텔 관리 소녀 등등이 떠오른다. 왜 이들을 언급하냐면 각각으로 부터 여러가지 생각과 사건이 있었다. 남미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을 다음 지점에서 다시 마주치거나, 누군가와 얘기하다보면 '아 그사람 나도 알아'라는 대화를 하게된다. 정말 세상이 넓으면서도 좁다.

 

 홍콩 청년은 매우 잘생겼었다. 나랑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진 않았다. 다만 그가 기억나는것은 여행 중반즈음에 만난 한국형님으로부터 그 사람을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에게 달러를 내밀며 환전 딜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유학 끝낸 한국 여성분으로 부터는 남미여행을 오는 한국인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남미로 여행을 오는 한국인들은 정말 다양한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전제조건은 퇴사였다. 그만큼 우리나라사람들이 이렇게 먼 나라로 오긴 힘드니까. 매우 유명블로거인 한국 누나는 남미 여행으로 책도 내고 투어팀도 이끌었다. 볼리비아에서 만난 한국인 아저씨는 20대때부터 해외여행을 자주 했는데, 한국식당만 돌며 정보를 수집해 여행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부인이 은행원 이랬다. 칠레에선 우연히 한국 투어팀과 마주치긴 했다. 그들의 사연은 다양해 보였지만 너무 짧게봐서 뭐 얘기를 못해봤다. 여튼 그 챕터에 그 인물들을 얘기해봐야지

 

 주말에 성당을 가야하는 소녀에게선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건 남미 사람들을 볼때마다 느끼는 그런것이었던거 같다. 그들에게 스페인어는 우리말 이고 카톨릭이 우리종교였다. 사실 역사로 놓으면 분명 본인들의 말과 종교가 있었을텐데 스페인어와 카톨릭이 너무나 당연히 된 그들을 보며 묘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글에선 쿠스코 주변 관광지를 갔던 얘기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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